고성능 차를 샀는데, 장보기에만 쓰고 있습니다.

#GATE 08
● 성장의 문 · EVOLVE
도입이 끝난 회사 앞에 섭니다.

고성능 차를 샀는데,
장보기에만 쓰고 있습니다.

[시리즈 리드] 성장하는 회사는 아홉 개의 문 앞에 선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규모의 문, 신뢰의 문, 진화의 문 – ACRAS가 8년의 현장에서 정리한 ‘성장의 9관문’을 한 편씩 해부합니다. 이번 편도 진화의 문 – 다만 이 문은 도입이 끝난 회사 앞에 섭니다. “페라리를 샀는데, 동네 마트 장보기에만 쓰고 있어요.” 우리가 고객사 임원들에게 직접 듣는 탄식에서 시작합니다.
올해 2월, SAP S/4HANA Cloud Public Edition 2602가 도착했습니다. 130개가 넘는 변경 항목을 담은 서른네 번째 메이저 릴리스였습니다(ACRAS Insight Research, 2026). 그 가운데 우리 회사가 켠 것은 몇 개입니까. 여기서 ‘켠다(turn-on)’는 비유가 아닙니다. 클라우드 ERP의 새 기능은 도착했다고 저절로 쓰이지 않습니다. 기존 화면의 작은 개선은 자동으로 반영되지만, 새 업무 시나리오와 AI 기능의 대부분은 우리 회사의 설정에서 범위를 활성화하고, 쓸 사람에게 권한을 열고, 현업이 실제 업무에서 쓰기 시작해야 비로소 켜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의 답은 대개 둘 중 하나입니다 – 세어 본 적이 없거나, 세어 보면 한 자리 수입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있는 회사도 아닙니다. 장애는 없고 마감은 제때 끝납니다. 도입 2~3년차 회사가 느끼는 것은 불만이 아니라 아까움에 가깝습니다 – 반기마다 새로워진다고 들었는데 무엇이 새로워졌는지 설명할 사람이 없을 때, 그 탄식이 나옵니다.

릴리스는 자동이지만, 흡수는 자동이 아닙니다.

이것은 태만이 아니라, 흡수 구조의 부재입니다

온프레미스 시절의 업그레이드는 몇 년에 한 번 오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예산을 잡고 인력을 모아 몇 달에 걸쳐 새 버전으로 갈아탔고, 그 시절 운영의 목표는 ‘탈 없이 갈아타는 것’이었습니다. 옳은 기준이었습니다. 클라우드는 이 전제를 바꿨습니다. 저희가 국내 최초로 SAP S/4HANA Cloud ERP-Public Edition을 구축했던 시절에는 한 해에 4번 업그레이드가 있었고, 현재의 업그레이드는 매년 2월과 8월 정해진 날에 도착하며, 고객과 저희가 온건히 감당해야 했던 그 갈아타는 수고의 대부분은 SAP가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회사 안의 기준은 그대로입니다 – 이번에도 탈 없이 지나갔는가. 도착한 변화를 누가 읽고, 무엇을 켜고, 어떻게 정착시킬지는 어느 부서의 일도 아닙니다. 릴리스는 자동이지만, 흡수는 자동이 아닙니다.
이 문이 지금인 이유는 2602가 보여준 방향에 있습니다. 정보를 찾아 주던 AI가 회계 정책을 읽고 전표 초안을 만들고, 현금 포지션을 계산해 자금 이동을 제안하는 에이전트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아직 Beta이지만 방향은 분명합니다(ACRAS Insight Research, 2026). 8월에는 서른다섯 번째 릴리스 2608이 뒤따랐습니다. 반기마다 이만큼의 변화가 쌓인다면, 켜는 회사와 켜지 않는 회사의 격차는 한 번의 차이가 아니라 복리로 벌어집니다.

운영의 두 번째 단계에 이름이 없었습니다

도입 프로젝트에는 이름과 일정과 예산이 있지만, 그 뒤의 운영에는 ‘유지보수’라는 이름만 있었습니다. 장애를 막고 요청을 처리하는 일만으로는 릴리스가 실어 온 변화를 회사 안으로 들여올 수 없습니다. 흔한 대응은 둘입니다. IT 담당자 한 사람이 변경 목록을 훑어 ‘영향 없음’으로 정리하거나, 아예 열어보지 않거나. 둘 다 이해할 만한 선택입니다 – 130개 항목을 현업의 언어로 번역해 켤 것을 골라내는 일은, 그 시스템을 설계한 사람이 아니면 어렵기 때문입니다.

배포된 기능은 재고이고, 정착된 기능만 성과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회계가 아니라 공장의 언어로 봅니다. 엘리 골드랫(Eliyahu M. Goldratt)은 『더 골(The Goal)』(1984)에서 공장의 성과를 세 가지로만 측정하자고 했습니다 – 팔려서 돈이 된 것(스루풋), 돈을 들여 사 두었지만 아직 팔리지 않은 것(재고), 재고를 스루풋으로 바꾸는 데 드는 비용(운영비용). 반기마다 도착하는 130개의 기능은 구독료로 이미 값을 치른 재고입니다. 현업의 화면에 켜져 매일 쓰이는 기능만이 스루풋입니다. 검토하고, 활성화하고, 정착시키는 노력이 운영비용입니다. 구독은 수령권을 삽니다. 그러나 수령권과 수령은 다릅니다 – 권리는 자동으로 갱신되지만, 수령은 누군가의 시간이 드는 행위입니다. 그 시간을 쓰지 않으면 재고는 반기마다 쌓이기만 합니다.
골드랫의 두 번째 통찰이 더 중요합니다. 공장의 산출은 가장 느린 공정, 곧 병목이 결정한다는 것. 릴리스 흡수의 병목은 SAP의 배포 속도가 아닙니다. 현업이 새 기능을 검토하고 시험해 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늘 부족하고, 앞으로도 늘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흡수 체계의 첫 번째 원칙은 ‘전부 검토’가 아니라 ‘병목 앞의 선별’입니다. 130개 중 우리 회사의 활성 범위와 겹치고 현업이 체감할 몇 개를 먼저 골라 병목에 올리는 것 – 설계 의도를 아는 쪽이 선별을 맡고, 현업은 고른 것만 시험하는 분업이 여기서 나옵니다.

반기마다 도착하는 기능은 구독료로 이미 값을 치른 재고입니다. 현업의 화면에 켜져 매일 쓰이는 기능만이 스루풋입니다.

개수가 아니라 비율로 잽니다

앨리스테어 크롤과 벤저민 요스코비츠(Alistair Croll & Benjamin Yoskovitz)는 『린 분석(Lean Analytics)』(2013)에서, 좋아 보이지만 행동을 바꾸지 않는 허영 지표와 비율로 표현되어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실행 지표를 구분했습니다. ‘이번 릴리스에 130개가 새로 릴리드 되었다’는 허영 지표입니다. 우리 범위와 겹치는 항목 중 몇 퍼센트를 검토했는가, 검토한 것 중 몇 퍼센트를 켰는가, 켠 것 중 몇 퍼센트가 약속한 오픈 시점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는가, 그리고 반기 뒤에도 쓰이고 있는가 – 검토율·활성화율·정착률, 이 세 비율이 클라우드 ERP 활용도의 실제 지표입니다. 이 숫자를 반기마다 기록하기 시작하면, 경영진의 ‘이 투자가 돌아오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처음으로 근거 있는 답이 생깁니다.

갈림길은 도입 2년차에 옵니다

토대는 한 번 세우고 끝나는 구조물이 아니라, 비즈니스 국면에 따라 살아 움직이며 고도화되는 체계입니다. 클라우드 ERP는 이 명제를 반기 단위로 강제합니다. 흡수 체계를 갖춘 회사는 2년 뒤 도입 당시보다 넓은 범위를 더 적은 사람으로 운영하고, 갖추지 못한 회사는 도입 당시의 범위에 머문 채 구독료만 갱신합니다. 같은 시스템, 같은 요금 – 격차는 시스템이 아니라 운영 체계에서 납니다.
그리고 그 격차는 앞으로 더 커집니다. 릴리스에 실려 오는 것이 화면 개선에서 에이전트로 옮겨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AI는 목적지가 아니라, 제대로 된 토대 위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다음 단계입니다 – 다만 ‘따라온다’는 말은 누군가 문을 열어 줄 때만 참입니다. 표준을 지켜야 하는 이유도 같습니다 – 개별 개발이 쌓인 시스템은 릴리스마다 회귀 테스트가 무거워져 결국 흡수를 멈춥니다. 좋은 설계는 오늘의 문제 만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선택지를 남겨두는 일입니다.

여덟 번째 문을 여는 질문

우리 회사의 위치는 세 가지 질문으로 잴 수 있습니다. 지난 릴리스에서 우리가 켠 기능은 몇 개인가 – 세어 본 적이 없다면 그것이 첫 번째 답입니다. 도착한 변경 항목을 우리 회사의 업무 언어로 번역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 사람은 시스템의 설계 의도를 아는가. 활용도를 무엇으로 재고 있는가 – 장애 건수인가, 검토율·활성화율·정착률인가.
도입 후 2년이 지났다면, 이 질문들은 다음 릴리스가 오기 전에 던져야 합니다. 도착한 변화를 꺼내 쓰는 체계 – 운영·지속 개선을 확인해 보세요.

반기마다 도착하는 변화를, 우리 회사는 얼마나 꺼내 쓰고 있습니까. → 운영·지속 개선

참고 자료
· Eliyahu M. Goldratt & Jeff Cox, The Goal: A Process of Ongoing Improvement, North River Press, 1984. 국역 『더 골』
· Alistair Croll & Benjamin Yoskovitz, Lean Analytics: Use Data to Build a Better Startup Faster, O’Reilly Media, 2013. 국역 『린 분석』
· ACRAS Insight Research, SAP Cloud ERP 2602 리뷰 – 에이전트형 ERP로의 전환이 시작되다, 2026. (사이트 내 Insight 리서치 링크) – 릴리스 사실과 기능 상태는 리뷰 검토 기준일(2026-05-15)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