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이 정해진 미래라면,
토대를 먼저 세웁니다.
AI 반도체를 설계하는 한 팹리스 기업과 일했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독자적인 아키텍처로 추론용 칩을 만드는 회사인데, 설계에 집중하고 생산은 외주에 맡기는 전형적인 팹리스 구조입니다. 이름은 밝히지 않지만,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이름이 아니라 이 회사가 내린 한 가지 선택에 있습니다.
두 개의 산을 동시에 올라야 하는 시기
제가 이 회사를 만났을 때의 상황은 분명했습니다. 양산은 본격적으로 늘려야 하고, 차세대 제품 개발도 동시에 가야 했습니다. 등반가는 보통 한 번에 한 산을 오릅니다. 이 회사는 두 산을 동시에 올라야 했습니다 – 오늘의 칩은 양산의 정상까지, 내일의 칩은 설계의 정상까지. 다행히 원정의 물자는 모이고 있었습니다. 대규모 투자가 들어오고 있었으니까요.
기술이 있고, 자본이 있고, 시장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장은 사실상 정해진 미래였습니다. 보통 이런 회사와의 첫 미팅은 ‘얼마나 빨리 할 수 있느냐’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자리에서 조금 다른 질문을 드렸습니다. 두 산을 동시에 오르는 원정에서, 정상은 두 개여도 베이스캠프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성장이 이미 정해진 미래라면, 정해지지 않은 건 하나뿐입니다.
두 산을 받칠 베이스캠프 – 그 성장을 감당할 토대가, 지금 준비되어 있습니까.”
두 산을 받칠 베이스캠프 – 그 성장을 감당할 토대가, 지금 준비되어 있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확장기의 회사에서 운영 체계는 늘 뒤로 밀립니다. 당장은 돌아가고 있고, 급한 건 언제나 제품과 고객이니까요. 저희도 그런 회사들을 많이 봤습니다. 매출이 가파르게 오르는데 내부 역량이 따라가지 못하면, 그 격차가 성장통이 됩니다. 그리고 도약과 정체의 갈림길은 이상하게도 꼭 확장기에 찾아옵니다.
이 회사 경영진이 인상적이었던 건 그 지점입니다. 속도가 가장 급한 시기에, 투자에 앞서 토대를 먼저 세우자는 판단을 함께 내렸습니다. 저는 이것을 의도된 역선택이라고 부릅니다. 느리게 가려는 게 아니라, 가장 빠르게 가려고 기본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기준은 하나였습니다
토대라고 해서 모든 걸 다 세운 건 아닙니다. 저희가 함께 잡은 기준은 하나였습니다. 나중에 바꾸려면 재구축이 되는 결정들을, 처음에 옳게 잡자. 그 기준으로 세 가지가 먼저 놓였습니다.
- • 첫째, 글로벌로 나갈 준비 – 하나의 거래를 서로 다른 회계기준으로 동시에 기록하는 병행원장과 다통화 체계를 법인이 늘기 전에 설계했습니다. 해외법인이 생길 때마다 재무 구조를 새로 짜는 게 아니라, 그대로 복제하면 되는 구조입니다.
- • 둘째, 물동이 늘어도 흔들리지 않을 운영 – 팹리스의 외주 공급망을 SAP 표준 프로세스로 정착시키고, 생산과 이동의 전 구간을 Lot 단위까지 추적되게 만들었습니다. 양산이 몇 배로 늘어도 괜찮은 이유는 수량이 아니라 추적성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 셋째, 시장이 믿을 숫자를 스스로 만드는 결산 – 사후에 점검하는 게 아니라 생성되는 시점에 신뢰할 수 있는 프로세스, 그리고 외부에 기대지 않고 자체적으로 돌아가는 감사 가능한 결산 체계입니다.
이 모든 걸 표준(Fit-to-Standard) 위에서 했습니다. 표준을 두고 ‘우리 방식대로 바꾸면 안 되느냐’는 논의는 어느 프로젝트에나 있습니다. 그때마다 저희가 드리는 말이 있습니다 – 표준은 제약이 아니라, 미래의 선택지를 지키는 설계라고. 이 프로젝트에서는 그 말이 처음부터 공용어였습니다.
회로는 깔려 있고, 스위치를 기다립니다
저는 이 토대를 설명할 때 회로라는 말을 씁니다. 지금 갖춰진 체계 위에, 트리거가 오면 다음 단계가 켜지도록 미리 깔아둔 회로. 해외법인과 상장이 오면 다법인 연결과 그룹 리포팅이 켜지고, 양산이 확대되면 외주생산관리(EPSM)와 S&OP가 확대되고, 대형 계약과 차세대 개발이 본격화되면 R&D 시수와 프로젝트 ROI 관리가 켜집니다. 토대는 한 번 세우고 끝나는 구조물이 아니라, 사업의 국면을 따라 살아 움직이는 체계여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AI
이 회사의 개발자들은 이미 AI와 함께 일합니다. 다음은 경영입니다. 다만 경영 정보는 정확성과 정합성이 생명이라, 순서가 있습니다. 검증된 표준 위에 경영의 토대를 세우고 –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양산과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AI가 배울 만한 스케일의 데이터가 정합성 있게 쌓입니다. 그 위에서 AI가 경영 전반으로 퍼져 갑니다. 저는 순서를 지킨 기업이 시행착오 없이 가장 빠르게 자율형 기업(Autonomous Enterprise)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프로젝트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 달라고 하면,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가장 빠르게 가려는 회사가, 기본부터 시작했습니다.”
“가장 빠르게 가려는 회사가, 기본부터 시작했습니다.”
성장이 정해져 있다면, 남은 질문은 토대입니다. 우리 회사의 토대를 점검해 보세요. → ERP 도입 진단